2011. 11. 8. 04:34ㆍShared Fantasy/Culture
아 시리다. 분명 영화가 슬퍼서 펑펑 울긴 울었는데 내가 뭐 때문에 울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부족한 아빠 "덕분에" 웃을 수 없는 소년기를 보낸 진수가 안쓰러워 눈물이 난건지, 아님 그 가정의 불행이 안타까워서인지, 혹은 창근이가 불쌍해서인지.. 어떤 감정에 의해 눈물샘이 자극됐는지 확신할 수 없으나 단순하게 스토리를 영상으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슬프게 안타깝게 불쌍하게 보는 이로 하여금 동정심을 사는 영상 표현이라서 슬펐던 건 아님이 확실하다. 나는 영화 시작 부분 ‘아버지가 밍키를 잡아먹던 그날 내 유년기는 끝났다’라는 내레이션에서 부터 표정 일그러지며 괜히 서글퍼졌다. 그런 감정은 글로 설명하기 힘든 거 같다. 불안하고 불편하고 찝찝하고 뭔가... 아무튼... 어떤 부분에서 공감하고 눈물을 흘렸는지에 관한 건 주관적인 문제이니 영화를 봐야 여기까지의 글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굿바이보이>를 보았다. 몇 일전 퍼블릭 사운즈에 멋지고 또 멋진 80년대 문화에 관한 글을 준비하면서 접하게 됐던 영화 <굿바이보이>. 80년대를 살아보지 못한 나로써는 그 시대의 문화를 겉핥기로 여태 남아있는 정보들에 의존해서 (그것도 웹상의) 습득할 수밖에 없는 거 같아 아쉽기도 하고 안타까웠다. 반면, 그동안 내가 접했던 그 시대의 것 이외에 여러 가지 정보들을 편하고 다양하게 접할 수 있었다.
나는 80년대의 음악들을 특히 좋아한다. 누구에 의해서도 영향받아본 적 없지만 어려서부터 음악으로는 특히 더 80년대를 동경했던 거 같다. 그랬던 내게 그날의 포스팅은 80년대 음악 이외에 다른 문화와 사회까지 공부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 중 하나가 영화인데, 개봉 당시 바로 쫓아가서 심야영화로도 봤던 <써니>도 개 중 하나이다. <써니>라면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써니>의 시간적 배경이 1980년대이다. 간단하게는 엄마아빠가 청춘이던 시절이다. 우리는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고 공감하기도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써니>의 주 관객층 또한 신작영화를 접하기 쉬운 젊은이들을 제외하면 대게 어른들 이셨을 거라 생각된다. <써니>가 흥행에 중점을 두어 코믹하거나 추억하기 좋은 대중적인 것들을 소개하는 영화였다면 <굿바이보이>는 조금 더 심도 있고 진지하게 그 시대의 현실상을 그렸다. 이 영화는 80년대를 사랑하던 내게 ‘문화’ 측면이 아닌 ‘사회’를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면에서 이 글은 사회적인 성향이 강하다. 80년대의 사회적 배경에 포커스를 맞추고 그 시대의 문제점들과 지나왔던 그 시절의 아픈 추억들을 영화로 나열했다.
80년대에는 충분히 평범할 수 있었던 가정에서 1남1녀 중 막내로 자라는 중학생 쯤 된 주인공 진수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사연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진수의 가정문제, 진수의 우정, 진수 성장기에 있어서의 방황. 이런 간단하고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모든 문제에는 80년대 사회상이 반영된다. 당원활동으로 방황하면서 무능한 아버지, 1년 여간 집을 비운 가장의 빈자리 때문에 결국 화류계에 몸담게 되는 지극히 한국 스러운 어머니, 가정생활에 충실하지 못한 아버지를 원망하며 동생인 진수와 대화할 때 항상 “니네아빠”라고 칭하며 남의 아빠 부르듯 무능한 아빠를 부정하고픈 큰딸 진숙이, 영화 속 1인칭 주인공으로 가족과 친구를 보며 힘들었던 80년대를 살아온 진수가 있다.
문득 떠올랐는데, 나 고등학교 1학년 공통사회 배우던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민주화운동 영상들을 보면서도 이 비슷한 기분으로 엉엉 울었던 거 같다. 당시에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 영상 본 아이들은 늘 숙연해지고 울음바다라고 하셨다. 도통 안 그럴 수가 없던 영상이라 기억된다. 그때와 같은 심정으로 자극이 됐고 목 놓아 엉엉 울었던 거 같다. 영화에서는 이런 사회적 문제들이 아버지의 무능함, 진수네 집 뒷방에 얹혀살고 민주화운동을 하다 맞아 죽고도 실종이라 신문에 소개되는 대학생 누나 등에 얽혀있다.
<굿바이보이>는 미성년자 관람불가의 영화이다. 어느 부분에서 미성년자가 관람할 수 없는 장면이 나왔을지 이 글을 처음부터 읽었던 이라면 대충은 짐작할 것이다. 진수네 집 뒷방에 세 얹혀사는 누나는 대학생임에도 불구하고 학교도 제대로 나가지 않으며 열중하던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신문배달을 하다가 골목에서 마주친 누나는 전경들의 방망이에 맞아 죽는다. 끝 또한 전경에 의해 피 흘리며 질질 끌려가지만 며칠 뒤 누나는 실종이라고 신문에 소개된다. 어떤 것인지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초중고 사회시간에 배웠으니 이해할거라 믿는다.
관객인 나도 자극적이었는데 영화 안에서 중학생인 진수는 어땠겠는가. 누나의 죽음을 계기로 진수에게 잠재된 폭력성은 진수가 겪는 비슷한 상황에서 폭발까지 하게 된다. 이 스토리의 구성은 분명 영화로 표현되어 시각적으로도 자극적이지만 내재된 의미 또한 적나라하고 잔인하며 공포스럽다. 어쩔 수 없이 보게 된 누나의 맞는 장면은 진수가 의식하지 않았어도 어린 중학생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이 비슷하게 신문집 사장에게 야구배트로 맞는 순간 절제할 수 없을 만큼 똑같이 폭발한 것이다. (누나를 때리던 전경처럼 진수가 신문집 사장을 야구배트로 무자비하게 때린다)
잔인하다. 80년대의 사회는 잔인하고 무서웠고 참혹했다. 그 현실을 새삼 한 번 더 깨닫는 무서운 영화였다. 누나의 죽음뿐만 아니라 후반부에서 창근이(진수의 친구)의 머리를 쇠 파이프로 마구 내리쳐 장애인을 만든 동네 양아치가 구청장인 아버지의 빽으로 증거불충분이라며 아무렇지 않게 거리를 쏘다니는 것 또한... (이건 80년대여서 뿐만 아니겠지만)
쉽게 접하고 쉽게 플레이할 수 있던 영화지만 마치고는 쉬울 수 없는 마음가짐을 갖게 하는 영화인거 같다. 현재시간 새벽 4시 30분. 감성이 가을 녘 굴러다니는 단풍 낙엽 같을 시간에 느끼고 있는 기분을 글로 쓰려니... 가슴이 아프다. 나는 아직 <도가니>라는 영화를 보지 못했다. 보고 싶었지만 단순하게 기회가 닿지 않았다. 지인과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도가니>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지인은 내게 딱 잘라서 <도가니>를 볼 마음이 없다고 했었다. 이유인 즉, ‘그런 사회적인 영화는 상영 후 스트레스만 더 생겨’라는 것이다. 당시에 나는 아무리 그래도 사회적으로 재조명되고 이슈가 될 정도의 이야기라면 한번 쯤 봐야하지 않을까 했었지만 이 영화를 마친 지금의 나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결국 지난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픽션의 이야기이지만 아직 내 감성이 여려서 인지, 아님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우리나라가 이런 곳이었다는 걸 기피하고 싶은 건지... 영화를 마치고 이런 답답한 심정으로 불편하게 잠들 줄 알았다면 이런 내용의 영화는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번의 지인과 같이 사회적인 문제의 영화가 관객에게 안겨주는 부담감 아닌 부담감, 혹은 스트레스가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기분 일테지.
이 포스팅은 Culture Webzine Public Sounds에서도 읽으실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