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 28. 00:25ㆍShared Fantasy/Culture
다른 장면 The Other Scene
이샛별展 / LISETBYUL / painting 2010_0521 ▶ 2010_0620 / 월요일 휴관
-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이샛별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10_0521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아리랑갤러리ARIRANG GALLERY부산시 해운대구 우동 1483 센텀큐 111Tel. +82.51.731.0373www.arirangmuseum.com
"그문화"에서 전시 동시오픈 (이 문장을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523b | 이샛별展으로 갑니다.)
흘러내리는 살 ● 이샛별의 작품 속에는 두 개의 자아가 존재한다. 하나는 파티용품점에서 구입한 토끼나 여우가면을 쓴 모습으로, 다른 것은 아니무스(animus)를 연상시키는 중성적 존재로서의 자아이다. 이 둘은 거의 대부분 푸른색의 트레이닝 복장을 하고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두 개의 자아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주체와 작가의 무의식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괴물이자 충동적 자아를 상징하는 것으로 독일어로 '이중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을 의미하는 도플갱어(Doppelganger)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와 같은 문학작품이나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도플갱어는 사실 심리적인 분열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징후라고 할 수는 없을 뿐만 아니라 한 인간의 인격을 선과 악이란 이분법적인 범주로만 규정하기 힘들기 때문에 라캉의 언어를 빌리자면 상상계의 부분인 자아(ego)와 상징계의 부분인 주체(subject)가 서로 충돌하는 장소로서 신체를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완전한 인격이란 사실 거의 불가능하며 오히려 인간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다중인격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삶을 드라마틱하게 만드는 요인일 경우도 많다. 따라서 이샛별의 작품 속에 등장하고 있는 두 자아는 그가 지닌 많은 자아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면을 쓴 자아는 표정을 감추고 있으나 무언가에 놀란 듯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는 자화상과 쌍을 이루며 세상을 바라보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놀란 자아가 바라보는 세상은 한마디로 서사적 구조를 지니지 않는 요지경이자 난장판이며 혼란의 도가니이다.
- 이샛별_붉은 집 the red house_캔버스에 유채_97×64cm_2010이샛별_붉은 집 the red house_캔버스에 유채_45.5×37.9cm_2010
- 이샛별_언뜻 보이는 섬광 An Instant Flash_캔버스에 유채_123×180cm_2010
예컨대 서양에서 크리스마스와 같은 축제동안 난장이, 불구자 등의 사회적 소수자들이 정해진 기간에 왕노릇을 하는 풍습으로부터 착안한 작품을 보면 전면에 토끼가면을 쓴 자아가 무릎을 꿇고 있고 맞은편에는 무언가를 집어삼키거나 혹은 뱉어내고 있는 자화상이 나타나고 있다. 화면은 그가 뱉어내고 있는 끈적끈적한 물질에 의해 두 개로 나눠진다. 이 물질은 현실이란 신체 속에서 급격하게 세포분열하며 성장하고 있는 암덩어리, 혼돈과 불안의 잉여물, 역겹도록 꿈틀거리며 증식하고 있는 괴물로서 화면 위를 스멀스멀 점유하고 있다. 연극무대 위의 연기자처럼 조명을 받고 있는 자화상 뒤로는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그에 대응하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나 루이14세를 연상시키는 기마상이 역시 젤라틴덩어리처럼 흘러내리는 형상으로 재현돼 있다. 녹색 잔디와 가지가 앙상한 나무는 화면 중앙에 뚫린 터널과도 같은 구조물에 의해 불길함을 고조시키지만 그 가운데 느닷없이 스트립쇼를 하고 있는 듯한 무용수가 출현하고 있어서 이 작품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는 지경이다. 이 이미지들은 어디서 왔는가. 그것들의 출처는 다양하다. 즉 작가는 인터넷, 신문기사 등에서 특정한 사건을 지시하는 것들을 수집하여 화면 속에 새로운 사건으로 재배치하고 있다.
- 이샛별_통합자 the unifier_캔버스에 유채_160×210cm_2010
이때 특정한 사건이란 비인간적인 폭력 그 자체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사건의 맥락이 박탈당한 채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복잡한 화면은 서로 상관없는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혼란스러운 조합에 의해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괴함(uncanny)의 형식으로 돌출되고 있으며 더욱이 연극적이면서 마술적인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이 복잡함은 보는 사람의 시선을 한 곳에 머물지 못하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의 시선은 화면의 여기저기를 불안하게 훑어내리며 마치 보물찾기 하듯 그가 걸어놓은 이야기구조를 찾아야만 한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흘러내리는 젤라틴 혹은 살덩어리로서 이것은 달리(Salvador Dali)의 끈적끈적한 해면체를 연상시킨다.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서로 상관없이 조합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보며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depaysement)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업이 자동기술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현실에 실재했던 사건을 재배치한 것이란 점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작품에서 작가는 연행 또는 불법적으로 납치되고 있는 사람들의 뒤켠에서 이 사건을 놀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 뒤의 창을 통해 젤라틴덩어리들이 삐져나오고 화면의 윗부분에 드리워진 커튼은 이 작품의 연극적 특징을 고양시킨다. 이 작품에서 사건을 증언할 목격자로서 주체는 화면의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다. 주체가 있었던 혹은 있었어야 할 자리를 미끌미끌한 액체가 마치 꿈의 한 단락처럼 점유하고 있다. 이 미끈거리는 액체를 향해 화생방 전쟁이나 실험실 혹은 오염된 지역을 세척하려는 마냥 특수장비를 착용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는데 정작 젤상태에 가까운 물질 위에는 유령처럼 하얀 실루엣으로만 표현된 한 여성이 침몰하고 있고 또 다른 여성은 고무튜브 위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낙하하고 있는 미사일은 이 미끈거리는 중간상태의 물질이 위험지대임을 암시한다. 붉은 색의 끈적끈적한 덩어리와 푸른색의 미끌미끌한 액체도 고체도 아닌 물질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현실이라기보다 꿈, 그것도 악몽에 가까운 것이다. 화면의 위로부터 드리워진 커튼이 내려오는 순간 이 낯설고 불안한 연극도 끝나겠지만 작가의 놀란 시선은 파국적 대단원을 지연시키고 있다. 그의 놀란 시선은 주체가 빠져나가버린 상태를 드러낸다. 그는 사건의 관찰자가 아니라 그 대상으로부터 전면적으로 노출돼 있다.
- 이샛별_공백 void_캔버스에 유채_112.1×162.2cm_2010
여기서 다시 라캉의 언어를 빌자면 그의 작품은 주체의 시선과 대상의 응시가 일치하지 않는 상태, 즉 주체의 분열을 드러낸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고 있는 익숙하면서 낯선 이미지, 예컨대 핵폭발이 만들어내는 버섯구름, 꽃이 되어버린 머리, 녹아내리는 신체는 모두 죽음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이 기이한 이미지들은 그의 내면에 잠재한 공포의 원형이 시각적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본래 허상인 상상계나 공포의 원인을 지각할 수 있는 상징계도 아닌 중간지대를 나타낸다. 현실의 폭력이 너무도 두려운 것이기 때문에 동그랗게 뜬 눈의 동공에 그 현실의 정보를 담지 못하고 은유, 비약, 왜곡, 상징의 방법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으므로 화면 속의 주체는 불가능의 영역인 실재계 곧 죽음이나 무의식으로 회구하려는 욕망을 지닌 존재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그의 화면은 주체의 시선이 미끄러지는 장소에서 대상의 응시가 전면으로 부상하는 공간이며, 주체의 공포는 흘러내리는 젤라틴 덩어리에 의해 비등한다. 이 흘러내리는 물질은 그의 신체의 외연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공포가 육화된 것이자 또한 작가 자신의 내면에서 충동질하는 폭력성을 은폐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저널리즘 등을 통해 수집한 현실의 공포가 너무도 가공할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주체가 그것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관찰하기를 거부한 그 시점에서 사건의 진상을 바라보려는 욕망도 좌절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는 복잡하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의 조합이란 방법을 통해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 이샛별_소거 elimination_캔버스에 유채_210×160cm_2010
서양의 가짜왕 놀이에서 주인공은 정해진 기간에 실제 왕에 필적하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짧은 시간이 지나면 예전처럼 사회적 소수자, 약자로서의 나머지 인생을 살아야 한다. 따라서 그가 전제적 왕으로서 누릴 수 있는 현실은 가짜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은 화면 속의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화면 속에서 바깥 세계를 바라보며 놀라고 있는 작가가 겪고 있는 불안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마치 자본주의가 걸어놓은 주술이자 최면인 물질만능주의, 경제우위의 논리가 폭발한 이후의 폐허를 암시하는 터널 너머에 있는 세계로 진입하고 싶지만 가짜현실이 제공하는 유혹이 강하기 때문에 차안(此岸)에 주저앉아 흘러내리는 살덩어리를 집어삼키는 주체가 열망하는 것은 연극의 끝이 아니라 지속이다. 즉 그는 자신이 대상에 의해 응시당하고 있음을 지속시킴으로써 자신이 현실의 폭력에 경악하고 공포에 시달리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은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자아가 페르소나(persona)도 아니고 더욱이 나르시시즘에 사로잡힌 신경증환자도 아니란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흘러내리는 살은 그의 신체의 연장이자 그가 느끼는 격심한 공포이기도 하므로 그것을 뱉어내거나 집어삼키는 원초적 행위는 잃어버린 낙원, 곧 유아기의 행복한 요람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의 표출이라고도 볼 수 있다. ■ 최태만
- 이샛별_분리 separation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10
흘러내리는 살
최태만/미술평론가
이샛별의 작품 속에는 두 개의 자아가 존재한다. 하나는 파티용품점에서 구입한 토끼나 여우가면을
쓴 모습으로, 다른 것은 아니무스(animus)를 연상시키는 중성적 존재로서의 자아이다. 이 둘은 거의
대부분 푸른색의 트레이닝 복장을 하고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두 개의 자아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주체와 작가의 무의식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괴물이자 충동적 자아를 상징하는 것으로 독일어로
‘이중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을 의미하는 도플갱어(Doppelganger)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와 같은 문학작품이나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도플갱어는 사실 심리적인 분열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징후라고 할 수는 없을 뿐만
아니라 한 인간의 인격을 선과 악이란 이분법적인 범주로만 규정하기 힘들기 때문에 라캉의 언어를
빌리자면 상상계의 부분인 자아(ego)와 상징계의 부분인 주체(subject)가 서로 충돌하는 장소로서
신체를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완전한 인격이란 사실 거의 불가능하며 오히려 인간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다중인격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삶을 드라마틱하게 만드는
요인일 경우도 많다. 따라서 이샛별의 작품 속에 등장하고 있는 두 자아는 그가 지닌 많은 자아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면을 쓴 자아는 표정을 감추고 있으나 무언가에 놀란 듯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는 자화상과 쌍을 이루며 세상을 바라보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놀란 자아가 바라보는
세상은 한마디로 서사적 구조를 지니지 않는 요지경이자 난장판이며 혼란의 도가니이다. 예컨대
서양에서 크리스마스와 같은 축제동안 난장이, 불구자 등의 사회적 소수자들이 정해진 기간에
왕노릇을 하는 풍습으로부터 착안한 작품을 보면 전면에 토끼가면을 쓴 자아가 무릎을 꿇고 있고
맞은편에는 무언가를 집어삼키거나 혹은 뱉어내고 있는 자화상이 나타나고 있다. 화면은 그가
뱉어내고 있는 끈적끈적한 물질에 의해 두 개로 나눠진다. 이 물질은 현실이란 신체 속에서 급격하게
세포분열하며 성장하고 있는 암덩어리, 혼돈과 불안의 잉여물, 역겹도록 꿈틀거리며 증식하고 있는
괴물로서 화면 위를 스멀스멀 점유하고 있다. 연극무대 위의 연기자처럼 조명을 받고 있는 자화상
뒤로는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그에 대응하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나 루이14세를 연상시키는 기마상이 역시 젤라틴덩어리처럼 흘러내리는 형상으로
재현돼 있다. 녹색 잔디와 가지가 앙상한 나무는 화면 중앙에 뚫린 터널과도 같은 구조물에 의해
불길함을 고조시키지만 그 가운데 느닷없이 스트립쇼를 하고 있는 듯한 무용수가 출현하고 있어서 이
작품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는 지경이다. 이 이미지들은 어디서 왔는가. 그것들의
출처는 다양하다. 즉 작가는 인터넷, 신문기사 등에서 특정한 사건을 지시하는 것들을 수집하여 화면
속에 새로운 사건으로 재배치하고 있다. 이때 특정한 사건이란 비인간적인 폭력 그 자체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사건의 맥락이 박탈당한 채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복잡한 화면은 서로 상관없는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혼란스러운 조합에 의해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괴함(uncanny)의 형식으로
돌출되고 있으며 더욱이 연극적이면서 마술적인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이 복잡함은 보는 사람의
시선을 한 곳에 머물지 못하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의 시선은 화면의 여기저기를 불안하게
훑어내리며 마치 보물찾기 하듯 그가 걸어놓은 이야기구조를 찾아야만 한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흘러내리는 젤라틴 혹은 살덩어리로서 이것은 달리(Salvador Dali)의 끈적끈적한 해면체를
연상시킨다.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서로 상관없이 조합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보며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depaysement)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업이 자동기술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현실에 실재했던 사건을 재배치한 것이란 점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작품에서 작가는 연행 또는 불법적으로 납치되고 있는 사람들의 뒤켠에서
이 사건을 놀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 뒤의 창을 통해 젤라틴덩어리들이 삐져나오고 화면의
윗부분에 드리워진 커튼은 이 작품의 연극적 특징을 고양시킨다. 이 작품에서 사건을 증언할
목격자로서 주체는 화면의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다. 주체가 있었던 혹은 있었어야 할 자리를
미끌미끌한 액체가 마치 꿈의 한 단락처럼 점유하고 있다. 이 미끈거리는 액체를 향해 화생방
전쟁이나 실험실 혹은 오염된 지역을 세척하려는 마냥 특수장비를 착용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는데 정작 젤상태에 가까운 물질 위에는 유령처럼 하얀 실루엣으로만 표현된 한 여성이
침몰하고 있고 또 다른 여성은 고무튜브 위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낙하하고 있는 미사일은 이
미끈거리는 중간상태의 물질이 위험지대임을 암시한다. 붉은 색의 끈적끈적한 덩어리와 푸른색의
미끌미끌한 액체도 고체도 아닌 물질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현실이라기보다 꿈, 그것도 악몽에 가까운
것이다. 화면의 위로부터 드리워진 커튼이 내려오는 순간 이 낯설고 불안한 연극도 끝나겠지만
작가의 놀란 시선은 파국적 대단원을 지연시키고 있다. 그의 놀란 시선은 주체가 빠져나가버린
상태를 드러낸다. 그는 사건의 관찰자가 아니라 그 대상으로부터 전면적으로 노출돼 있다. 여기서
다시 라캉의 언어를 빌자면 그의 작품은 주체의 시선과 대상의 응시가 일치하지 않는 상태, 즉 주체의
분열을 드러낸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고 있는 익숙하면서 낯선 이미지, 예컨대 핵폭발이 만들어내는
버섯구름, 꽃이 되어버린 머리, 녹아내리는 신체는 모두 죽음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이 기이한
이미지들은 그의 내면에 잠재한 공포의 원형이 시각적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본래 허상인 상상계나 공포의 원인을 지각할 수 있는 상징계도 아닌 중간지대를 나타낸다. 현실의
폭력이 너무도 두려운 것이기 때문에 동그랗게 뜬 눈의 동공에 그 현실의 정보를 담지 못하고 은유,
비약, 왜곡, 상징의 방법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으므로 화면 속의 주체는 불가능의 영역인 실재계 곧
죽음이나 무의식으로 회구하려는 욕망을 지닌 존재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그의 화면은 주체의
시선이 미끄러지는 장소에서 대상의 응시가 전면으로 부상하는 공간이며, 주체의 공포는 흘러내리는
젤라틴 덩어리에 의해 비등한다. 이 흘러내리는 물질은 그의 신체의 외연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공포가 육화된 것이자 또한 작가 자신의 내면에서 충동질하는 폭력성을 은폐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저널리즘 등을 통해 수집한 현실의 공포가 너무도 가공할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주체가 그것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관찰하기를 거부한 그 시점에서 사건의 진상을 바라보려는
욕망도 좌절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는 복잡하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의 조합이란 방법을 통해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가짜왕 놀이에서
주인공은 정해진 기간에 실제 왕에 필적하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짧은 시간이
지나면 예전처럼 사회적 소수자, 약자로서의 나머지 인생을 살아야 한다. 따라서 그가 전제적
왕으로서 누릴 수 있는 현실은 가짜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은 화면 속의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화면 속에서 바깥 세계를 바라보며 놀라고 있는 작가가 겪고 있는 불안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마치 자본주의가 걸어놓은 주술이자 최면인 물질만능주의, 경제우위의 논리가 폭발한 이후의
폐허를 암시하는 터널 너머에 있는 세계로 진입하고 싶지만 가짜현실이 제공하는 유혹이 강하기
때문에 차안(此岸)에 주저앉아 흘러내리는 살덩어리를 집어삼키는 주체가 열망하는 것은 연극의 끝이
아니라 지속이다. 즉 그는 자신이 대상에 의해 응시당하고 있음을 지속시킴으로써 자신이 현실의
폭력에 경악하고 공포에 시달리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은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자아가 페르소나(persona)도 아니고 더욱이 나르시시즘에 사로잡힌 신경증환자도 아니란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흘러내리는 살은 그의 신체의 연장이자 그가 느끼는 격심한
공포이기도 하므로 그것을 뱉어내거나 집어삼키는 원초적 행위는 잃어버린 낙원, 곧 유아기의 행복한
요람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의 표출이라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