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 겸 필름 메이커 김유원이 본 '2018광주비엔날레'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모델 겸 필름 메이커 김유원이 ‘2018광주비엔날레’로 향했다. 멀지 않은 미래에 광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그녀. 이번 한국 여정에서 광주 비엔날레 참관은 그녀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비엔날레 올 해의 주제인 ‘상상의 경계들’을 아래 그녀의 글로 풀어낸다.


광주로 가기 전 부산 비엔날레에 먼저 들렀다. 거기서 보았던 에바 그루빙어의 ‘군중’이라는 작품을 먼저 떠올려 본다. 전시장에 발을 디디기도 전, 입구에 긴 바리케이드가 구불구불 설치되어 있었다. 그만한 관객이 없었기에 이게 뭔가 했더니 입장을 하려면 여러 방향으로 왔다 갔다 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바리케이드를 따라 걸어야 하는 작품이었다.

사회에는 국경, 규율, 금기같은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공간을 마음대로 가로지를 수도 없고 개인의 욕망 역시 바리케이드의 방향으로만 안내된다. 비록 자신의 취향 또는 자유 의지라 믿고 있더라도 그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바리케이드는 대지를 구획하고 공기를 이분법으로 카테고리화 한다. 정상과 비정상, 개인과 집단, 인간과 자연, 과거와 미래, 노동과 삶, 근대와 전근대까지. 우리의 삶과 문화가 칼로 단번에 썰어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는 새로 깔린 보도 블럭, 고층 아파트 같이 똑같은 것들이 반복되는 신도시의 미학 안에 살고 있다. 평일 아침에는 깨끗한 지하철과 도로를 거쳐 직장으로, 주말에는 쇼핑몰로 실려 나간다. 물론 그 안에 각자 나름의 행복과 불행이 있지만 그 것이 과연 본인의 선택일까? 혹시 TV 앞을 떠날 수는 없으면서 단지 채널을 맘대로 돌릴 수 있다는 것 만으로 자신이 자유롭다 믿고 있는 건 아닐까?


도시는 개개인을 종속하는 거대한 수용소나 다름 없다. 우리는 사회구성원으로 태어나 삶의 방식, 공동체, 인간 관계도 구획 화하는 수용소의 시간을 살고 있으며 수용소의 말을 하고 마치 단군신화처럼 ‘근대’라는 단 하나의 신화를 믿는다. 근대라는 벽은 무자비하게 높고 그 안의 길은 강제적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않는 것이 아니다. 그루빙어의 기나긴 바리케이드를 따라 걸으면서 생각했다. 규율, 권력 체계 같이 보이지 않는 사회 언어들을 상징적이고 역설적으로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는 것이 예술 언어가 아닐까?

광주 비엔날레는 그 근대라는 대서사를 어떻게 좇아왔는지 보여주고 있다. 끊임없이 자신의 과거를 ‘전근대’라고 타자화하며 형체를 바꾸어 온 그 신화의 발생, 전개를 아시아의 입장에서 서술하려는 시도다. 언어는 의식에 선행하고, 곧 의식을 규정한다. 근대의 언어가 세상을 과거와 미래, 시골과 도시, 노동과 삶으로 나눴 듯이 말이다.

때론 단어 하나에서 질문을 던지는 게 사유를 시작하는 좋은 방법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번 광주 비엔날레의 키워드인 ‘경계’라는 단어에서부터 시작해 작품들에 접근해보기를 권한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 첫 해의 주제는 ‘경계를 넘어’였다. 올해 비엔날레 주제는 ‘상상된 경계들’이다. 첫 해의 ‘경계’란 유토피아적 희망을 내포한 "함께 뛰어넘을" 고난의 로맨틱한 말이었다면, 그 후 약20년이 지난 현재의 ‘경계’는 앞서 언급했던 그루빙어의 ‘군중’ 처럼 실제 세워진 단단한 벽도 아닌데도 우리의 삶을 통제하고 안전하게 안내하는 신자유주의의 환영이다.


2, 3 전시실의 ‘경계라는 환영을 마주하며’는 경계가 그려지고 또 지워질 때 그 사이에 끼어들어간 개개인의 삶, 즉 미시적인 역사를 끌어온다. 큐레이터인 그리티야 가위웡은 인터뷰, 아카이브 등 광범위한 리서치를 통해 20여 년이 지난 지금 국경, 영토, 이주의 패러다임을 아시아의 입장에서 다시 쓰려는 시도를 한다. 주목할만한 작품으로는 Ho Tzu Nyen의 ‘The Nameless’ 를 꼽고 싶다. 이 작품은 국가 이데올로기라는 큰 서사에 의해 아이덴티티가 지워져야 했던 실제 인물의 현실을 그렸다. 작가는 말레이시아 공산당 요원 ‘라이 테크’라는 이의 현실을 재구성하기위해 양조위가 출연한 영화들을 재료로 활용했다. 때문에 라이 테크는 마치 헐리우드 누아르 영화에 나오는 미스테리하고 매력적인 등장인물로 보여지기까지 한다. 그 때 생겨나는 시간적 정신적 거리에서 근대 신화를 비롯한 거대 이데올로기의 주체는 따로 있다는 묘한 아이러니를 언급하고 있다.


4전시실의 ‘‘종말들: 포스트 인터넷 시대의 참여정치’에서는 자크 블라스, 마틴 심스, 호 루이 안 등의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민족과 국가의 경계가 글로벌 네트워크와 인프라로 빠르게 옮겨지는 과도기에 겪었던 고찰을 담은 작업들이다. 단순히 미디어의 변화 뿐 아니라 권력, 통제 기술, 언어, 구분 체계 역시 자본주의를 가속화하는 일종의 신식민주의 확장이 아닐지 같은 비판적 시각을 제시한다. 그 중 김아영 작가의 비디오 설치 작업 ‘다공성 ___________계곡’은 물리적 신체 이주와 유동적 데이터 이주의 대조를 일종의 블랙코미디 같은 SF영상으로 다룬다. 대지에 구멍이 생기며 지표면 아래가 듬성듬성해지는 지질학적 다공성 개념을 개연성이 결여되고 있는 현재 ‘경계’의 담론에 은유한다.

실제 우리의 삶과 ‘경계’라는 환영의 간극을 지각하고 해독하는 것은 우리 몫이다. 최근에 읽은 프랑크 베라르디비포의 ‘봉기’ 한국어판 서문의 일부를 인용한다.

노동조건의 불안정, 일상적 삶과 사회적 소통의 파편화가 사회적 연대의 조건들을 파괴했고, 우리가 근대라는 과거의 세기들로부터 물려받은 정치적 행동의 형식들은 자본주의 권력의 형식이 변했기 때문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전망에서 정치적 행동을 상상해야한다.


어느 편에서는 자본, 국가주의, 안보 등의 원리로 개개인의 삶과 공동체가 파편으로 조각 조각 흩어져있다. 이들에게 경계란 곧 생과 사로 직결되는 문제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는 자본의 유연한 거래와 데이터의 무제한 증식을 위해 '경계'라는 개념을 무던히 여긴다. 그곳에서 자본은 흐르는 물같이 자유롭다. 신용카드 하나로 국경과 시간을 넘는 것이 가능한 시대임에 불구하고 또 누구는 전쟁을 피할 곳이 없거나 강제 이주 당해 남의 나라에 얹혀 살아야 한다는 것이 진정한 아이러니다.

과거 세기로부터 정치적 행동을 물려받은 인간은 변해버린 경계와의 관계에서 길을 잃는다. 이렇게 유연해지는 ‘경계’의 개념은 이 시대에 가장 예민하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첨예한 주제가 아닐까. 우리는 선별적으로 선명하고 희미해지는 이 ‘경계’라는 아이디어를 완전히 새롭게 상상해야한다. 우리는 ‘경계’라는 게슈탈트의 어디를 지나고 있는가? 아시아 국가들과 그 안의 개개인은? 경계가 그려지고 또 사라질 때 누군가들의 삶은 파편화 되었는가? 경계를 그리고 지우는 건 대체 누구인가?



에디터 임예성
글, 영상 김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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